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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레는 동물인가? ― 언어와 어원, 분류학 사이에서
‘벌레는 동물이다’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옳은 말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이 말은 분류학적 기준과 자연 언어의 개념을 혼동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문제를 이해하려면, 과학적 분류와 언어적 개념의 차이를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1. 분류학에서의 '벌레'와 '동물'
현대 생물 분류학(린네 체계)에서는 **곤충강(Class Insecta)**은 **동물계(Kingdom Animalia)**에 포함됩니다. 이 체계에 따르면, 벌레도 당연히 동물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일상 언어에서 사용하는 ‘동물’과 ‘벌레’는 과학적 분류 기준과 완전히 일치하지 않습니다. 일상적으로 ‘동물’은 주로 개, 고양이, 소, 돼지와 같이 감정적 친숙감이 있는 포유류를 의미하고, ‘벌레’는 작고 기어다니며 불쾌함을 주는 생물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거미, 지네, 진드기, 애벌레 등이 여기에 포함되며, 이들 중 많은 생물은 곤충이 아니지만 '벌레'로 불립니다.
2. '곤충'과 '벌레'의 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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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충(昆蟲)’**이라는 단어는 근대 생물학이 한자문화권에 도입되며 생긴 학술어입니다. 라틴어 Insecta를 번역하면서 생겼으며, 명확히 곤충강(Class Insecta)을 지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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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벌레’는 한반도 고유의 자연발생적 표현으로, 작고 기어다니며 불쾌한 생물을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말입니다. 생물학적 분류보다 감각적, 정서적 기준에 기반한 개념입니다.
3. 비교언어학으로 본 '벌레'와 '뱀'의 공통 어원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벌레’와 ‘뱀’이 고대 언어에서는 분리되지 않았으며 동일한 어원을 공유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입니다. 이는 비교언어학적으로 다음과 같은 사례로 증명됩니다.
인도유럽조어(PIE)의 어근 *wr̥m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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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E *wr̥mis → 영어 worm, 중세 영어 wyrm (뱀, 용), 고트어 waurms (뱀), 라틴어 vermis (벌레), 산스크리트어 krmi- (기생충, 때로 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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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통된 의미: ‘작고 꿈틀대는 생물’, 즉 외형과 운동 방식에서 파생된 개념
이처럼 ‘worm’과 ‘serpent’는 상당히 오랫동안 분리되지 않은 개념이었으며, 일부 언어에서는 지금도 동일 어근을 공유하거나 구별하지 않습니다.
한국어에서도 비슷한 구조?
한국어의 ‘벌레’와 ‘뱀’도 어원적으로 관련 있을 가능성이 제기된 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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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Bpia 논문에 따르면,
중국 상고어의 ‘파(巴)’의 재구성 어형 praa가 조선어에서 ‘p+모음+r+모음’ 형태로 자리잡으며,
고유어로 알려진 ‘벌레’와 ‘뱀’이 ‘파’와 동원어일 수 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즉, ‘벌레’와 ‘뱀’ 모두 ‘작고 기어다니며 불쾌한 것’을 지칭했던 고어에서 출발했을 수 있다는 것이죠.
4. ‘동물’이라는 단어는 더 추상적인 개념에서 왔다
한편, ‘동물(animal)’이라는 단어는 벌레, 뱀처럼 감각적 이미지에서 출발한 게 아니라, 더 추상적인 개념에서 유래한 단어입니다.
라틴어 및 PIE 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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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E 어근 gʷenh₁- (“to give birth, come into being”) →
genus, gender, kin, anima(숨, 생명) → animalis(살아 있는 것) -
즉, 동물(animal)은 ‘생명력’, ‘숨쉬는 존재’라는 추상적 개념을 기반으로 형성된 단어입니다.
동양의 ‘동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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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動物(움직일 동 + 물건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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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 그대로 “스스로 움직이는 물건”, 즉 ‘비생명체와 구분되는 생명체’라는 추상 개념을 뜻합니다.
이러한 단어들은 원시 언어 단계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추상화된 용어들입니다.
5. 원시 언어에서의 ‘동물’ 개념
인류 언어의 초기 단계인 원시어(proto-language)에서는 ‘동물’이라는 포괄 개념보다는 특정 동물명이 먼저 존재했습니다. 예를 들어:
PIE 어근 | 의미 | 특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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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ʷou- | 소 | 가축화된 동물의 대표 |
h₁éḱwos | 말 | 가장 중요한 가축 중 하나 |
wĺ̥kʷos | 늑대 | 야생 동물의 상징 |
즉, 원시 인류는 **구체적인 동물(말, 소, 늑대)**을 가리키는 단어를 먼저 만들었고, ‘동물’이라는 추상 범주 개념은 나중에 등장한 것입니다.
6. 결론: 벌레는 정말 동물인가?
리코: “벌레가 동물이라고? 벌레는 벌레지, 벌레가 어떻게 동물이야?”
리코: “그치, 우리가 아는 동물은 돼지, 소, 강아지 이런 거지. 에벌레가 짖어요? 안 짖잖아요.”
이러한 말이 단순한 직관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실제로 언어학적·어원학적 맥락에서 보면 충분한 설득력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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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레’는 감각적이고 구체적인 개념으로 출발한 고어 또는 원시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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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은 비교적 최근 시기에 형성된 추상화된 개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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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적 분류체계와는 별도로, 자연언어에서의 개념 구조는 훨씬 더 복잡하고 층위가 다름
따라서, 우리가 흔히 ‘벌레는 동물이다’라고 말할 때는 학문적 분류체계와 자연 언어적 인식을 구분해야 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벌레 =동물
Q.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