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싸 수붕이들은 다 불금을 즐기러 떠나 버려서 빈집이 된 수용소에
정신나간 사회 최하층 공무원따리 두명이 벽딸을 치고 있는데
이에 버금갈 정도로 할 일이 없는 놈들이 수용소에서 피폭당하는 중임...
Q. 이것은 사회적 약자들은 왜 항상 고통받고 사회적 강자들은 항상 비웃는가의 하나의 축소판을 보는듯 하지 않은가? 한국 사회에서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은 항상 그들에게는 의미없는 정치적 투쟁을 벌여나가는데 강자들은 어떠한 정권에서도 생산수단을 독점하고 스스로의 부를 늘려나가지 않는가?
1. "가난한 자의 벽딸"은 왜 비웃음을 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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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딸’은 대부분이 관심 없는 사변적 글, 철학적 글, 현실을 반영하는 우울한 분석 글을 의미하죠. 이는 루저의 자기위안, 또는 의미 없는 투쟁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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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행동은 절망 속에서라도 세계를 이해하려는 시도이고, 이는 철학이 시작된 원초적인 지점(고통과 불안의 극복 욕구)과도 닿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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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벽딸이 "할 일 없는 사회 최하층 공무원따리"의 행위로 조롱당하는 것은, 사회가 진정성 없는 사유보다는 생산성과 소비, 효율성과 재미에만 가치를 둔 결과입니다.
2. 사회적 약자는 왜 '무의미한 정치적 투쟁'만 반복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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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에 따르면, 진정한 계급 해방은 생산수단의 소유가 바뀌는 데서 출발합니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빈민 계층은 생산수단에 대한 통제는커녕, 그 개념조차 알지 못한 채 정치적 '이데올로기 싸움'에만 몰입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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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윤석열이냐 이재명이냐의 문제는 정작 그들의 삶에 실질적인 변화를 주지 못합니다. 그들은 단지 ‘이 편이 이기면 내가 기분이 풀릴 것 같다’는 정서적 보상만 얻을 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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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마치 노예들이 서로 주인을 자랑하며 싸우는 광경과 비슷합니다. 주인은 바뀌어도 그들은 여전히 굴레 안에 있습니다.
3. 반면, 강자들은 항상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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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트 계층, 자산가, 생산수단 보유층은 어떤 정권이 오든 큰 변화를 겪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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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정권도, 윤석열 정권도, 그들에게는 그냥 세금율과 투자 분위기 조정 정도의 변화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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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한국 사회에서 상위 10%의 자산가들은 어떤 정부 하에서도 부를 축적하는 데 실패한 적이 없습니다.
이들은 투쟁하지 않고도 이깁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예 경기장 바깥에서 심판과 룰북을 관리하고 있으니까요.
4. 디지털 커뮤니티 속 ‘계급 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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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용소라는 공간은 디지털 공간임에도 현실의 계급 구조와 놀랍도록 비슷한 서열과 질서를 재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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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싸 수붕이들 → 돈과 시간 여유가 있는 상대적 강자
벽딸 수붕이들 → 고립된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있는 약자
이 구조는 **현실 자본의 구조를 반영한 디지털의 ‘사회학적 은유’**입니다.
5. 결론
"비웃고 떠난 자들은 현실에서도 웃으며 떠날 수 있는 사람들이고, 벽딸을 남긴 자들은 적어도 ‘기억’이라는 흔적을 남기려는 자들이다."
한국 사회는 점점 정치가 삶을 바꾸지 못하는 사회가 되고 있습니다. 대신 감정의 투쟁만 남아버린 곳.
그 와중에도 고통받는 이들은 ‘말’이라도 해보려 하지만, 그 말조차 비웃음의 대상이 됩니다.
이건 ‘무의미한 정치적 싸움’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고통을 견디기 위한 마지막 방어선일 수 있습니다.
Q. 이런 벽딸 취급 당하는 철학적 사고가 현실 사회에서 영향을 끼치고 다른 이들에게 인정받으려면 어떠한 노력이 필요한가?
“벽딸”이라 불리는 철학적 사고, 즉 주류의 관심 밖에 놓인 사유와 사색이 어떻게 현실에 영향력을 끼치고, 타인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가? — 이건 철학자들이 수천 년간 싸워온 문제입니다. 당신의 이 질문은 사실상 "사유는 어떻게 힘을 가지는가?" 라는 물음입니다.
정답은 간단하지 않지만, 다음의 세 가지 방향으로 정리해볼 수 있습니다:
1. 현실의 ‘언어’로 번역하는 능력 – 철학은 혼잣말이어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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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깊고 정교한 통찰이라도, 그것이 현실의 맥락에 닿지 않으면 사람들에게는 그냥 ‘뻘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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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딸”이 ‘공감’을 얻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벽딸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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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사고가 사회에 영향을 미치려면, 그것은 현실 언어로 해석되고 번역되어야 합니다.
-
예) 마르크스는 경제학이라는 현실의 언어를 빌려 철학을 실천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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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들뢰즈는 문학과 예술이라는 감성의 언어를 통해 철학을 전파했죠.
-
📌 당신이 아무리 정곡을 찌르는 글을 써도, 그것이 다른 이의 ‘몸’과 ‘삶’에 울림을 주지 않으면 그건 자기만족일 뿐입니다.
2. 철학은 연대 없이는 외톨이다 – 그렇다, 결국 프롤레타리아적 연대가 필요하다
-
벽딸이 인정받으려면, 결국 그 벽을 ‘함께 보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즉, ‘연대의 장’을 만들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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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단순히 “사람이 많아야 힘이 생긴다”는 말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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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가 힘을 가지는 순간은, 그것이 한 사람의 절박한 통찰에서 시작되어, 다른 이들의 언어로도 말해질 때입니다.
— 이건 마르크스가 말한 **계급의식(클라스 의식)**이 형성되는 과정과 정확히 닮아 있어요. -
벽딸을 벽딸이 아니게 만드는 유일한 길은, 그것이 ‘벽이 아니라 창문’이 되는 순간입니다.
즉, 누군가 그 글을 통해 세상을 본다면, 그건 단순한 오타쿠의 낙서가 아니라 ‘창문’이 되는 거예요.
3. 자기고립이 아닌 자기확장을 선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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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고립은 종종 우월감이라는 함정을 동반합니다. "내가 너희보다 더 깊이 본다"는 식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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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고립된 사유는 결코 사회를 바꾸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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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에 ‘개입하는 철학’**을 해야 합니다. 말로든, 글로든, 실천으로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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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사회운동, 문화기획, 텔레그램 채널, 유튜브, 커뮤니티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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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중요한 건 사유를 전달하는 기술, 전파하는 매체, 받아들일 수 있는 집단입니다.
🎯 정리: 벽딸을 철학으로, 철학을 현실로 만드는 조건
필요 요소 | 설명 |
---|---|
현실 언어로 번역된 사유 | 추상적 담론을 구체적 삶의 언어로 끌어내려야 함 |
공감하는 공동체(=연대) | 사유는 연대 속에서 현실에 영향력을 갖게 됨 |
실천적 발화 방식 | 문학, 예술, 운동, 플랫폼 등으로 외부에 노출되어야 함 |
자기고립을 넘는 확장성 | ‘나는 이걸 알아’에서 ‘너도 이렇게 볼 수 있어’로 넘어가야 함 |
“벽에 말하는 게 아니라, 누군가가 그 벽을 함께 보고 있다고 느끼는 순간, 우리는 철학자가 되는 것이다.”
당신의 사유가 벽에 묻혀버리지 않도록, 연대의 장을 만들고, 현실 언어로 번역하는 작업, 그리고 타인에게 내 사고를 선물할 용기가 필요합니다.
“벽딸”이라 불리는 철학적 사고, 즉 주류의 관심 밖에 놓인 사유와 사색이 어떻게 현실에 영향력을 끼치고, 타인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가? — 이건 철학자들이 수천 년간 싸워온 문제입니다. 당신의 이 질문은 사실상 "사유는 어떻게 힘을 가지는가?" 라는 물음입니다.
정답은 간단하지 않지만, 다음의 세 가지 방향으로 정리해볼 수 있습니다:
1. 현실의 ‘언어’로 번역하는 능력 – 철학은 혼잣말이어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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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깊고 정교한 통찰이라도, 그것이 현실의 맥락에 닿지 않으면 사람들에게는 그냥 ‘뻘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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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딸”이 ‘공감’을 얻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벽딸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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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사고가 사회에 영향을 미치려면, 그것은 현실 언어로 해석되고 번역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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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마르크스는 경제학이라는 현실의 언어를 빌려 철학을 실천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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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들뢰즈는 문학과 예술이라는 감성의 언어를 통해 철학을 전파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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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이 아무리 정곡을 찌르는 글을 써도, 그것이 다른 이의 ‘몸’과 ‘삶’에 울림을 주지 않으면 그건 자기만족일 뿐입니다.
2. 철학은 연대 없이는 외톨이다 – 그렇다, 결국 프롤레타리아적 연대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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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딸이 인정받으려면, 결국 그 벽을 ‘함께 보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즉, ‘연대의 장’을 만들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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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단순히 “사람이 많아야 힘이 생긴다”는 말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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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가 힘을 가지는 순간은, 그것이 한 사람의 절박한 통찰에서 시작되어, 다른 이들의 언어로도 말해질 때입니다.
— 이건 마르크스가 말한 **계급의식(클라스 의식)**이 형성되는 과정과 정확히 닮아 있어요. -
벽딸을 벽딸이 아니게 만드는 유일한 길은, 그것이 ‘벽이 아니라 창문’이 되는 순간입니다.
즉, 누군가 그 글을 통해 세상을 본다면, 그건 단순한 오타쿠의 낙서가 아니라 ‘창문’이 되는 거예요.
3. 자기고립이 아닌 자기확장을 선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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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고립은 종종 우월감이라는 함정을 동반합니다. "내가 너희보다 더 깊이 본다"는 식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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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고립된 사유는 결코 사회를 바꾸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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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에 ‘개입하는 철학’**을 해야 합니다. 말로든, 글로든, 실천으로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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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사회운동, 문화기획, 텔레그램 채널, 유튜브, 커뮤니티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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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중요한 건 사유를 전달하는 기술, 전파하는 매체, 받아들일 수 있는 집단입니다.
🎯 정리: 벽딸을 철학으로, 철학을 현실로 만드는 조건
필요 요소 | 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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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 언어로 번역된 사유 | 추상적 담론을 구체적 삶의 언어로 끌어내려야 함 |
공감하는 공동체(=연대) | 사유는 연대 속에서 현실에 영향력을 갖게 됨 |
실천적 발화 방식 | 문학, 예술, 운동, 플랫폼 등으로 외부에 노출되어야 함 |
자기고립을 넘는 확장성 | ‘나는 이걸 알아’에서 ‘너도 이렇게 볼 수 있어’로 넘어가야 함 |
“벽에 말하는 게 아니라, 누군가가 그 벽을 함께 보고 있다고 느끼는 순간, 우리는 철학자가 되는 것이다.”
당신의 사유가 벽에 묻혀버리지 않도록, 연대의 장을 만들고, 현실 언어로 번역하는 작업, 그리고 타인에게 내 사고를 선물할 용기가 필요합니다.